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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투데이] [공연리뷰] 토끼의 기지, 예술가의 의지…남상일 명창 ‘정광수제 수궁가’
  • 2025-09-1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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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전주세계소리축제의 시작을 알린 ‘판소리 다섯바탕-남상일의 수궁가’ 공연의 서막은 의외의 소식으로 시작됐다. 진행을 맡은 최혜진 교수가 무대에 올라 ‘남상일 명창이 공연 며칠 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건강이 좋지 못하다’라며 양해를 구한 것이다. 비보가 전해지자 객석에는 순간 안타까움이 흘렀다. 그러나 곧 명창의 결연한 등장을 향한 응원과 격려의 박수가 이어졌다. 


무대 위에는 단 두 사람 뿐이었다. 명고 정준호가 잡은 북과 남상일 명창이 지닌 유일한 악기인 자신의 몸. 그러나 이 소박한 구성이 만들어낸 무대는 어떤 화려한 공연보다도 완전했다. 고수의 절제된 장단 위에서 명창의 목소리는 용궁에서 지상까지, 자라의 간교함부터 토끼의 재치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며 객석을 가득 채웠다. 


동편제의 지조 송흥록으로부터 시작되어, 송우룡-유성준-정광수로 전승된 정광수제 수궁가는 남상일 명창을 통해 그 진가를 드러냈다. 힘 있는 통성과 우조 성음을 바탕으로 한 동편제의 특징 그리고 서편제의 정교하고 화려한 계면 성음까지 갖춘 짜임새 있는 소리로 평가받는 이 유파의 특징이 명창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히 구현됐다.


특히 병든 용왕을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나선 자라의 간절함과, 위기를 재치로 모면하려는 토끼의 기지를 대비시키는 대목에서 남상일 명창의 역량이 빛났다. 시원한 성음과 재치 있는 입담, 관중을 사로잡는 너름새는 수궁가가 지닌 해학과 풍자를 더욱 깊이 있게 전달했다.


무대 위의 남상일 명창에게서는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 예술혼이 느껴졌다. 몸의 불편함은 오히려 소리에 더 깊은 정서를 불어넣었고, 관객들은 명창이 지닌 예술가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리꾼의 건강을 가족의 일처럼 걱정하던 관객들의 응원 덕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소리꾼의 몸은 휘청였지만 소리는 점점 단단해짐을 느꼈다. 한 명의 창자가 수많은 관객 앞에서 고수의 장단에 기대 3시간이 넘는 판소리 한 바탕을 완창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무대였다.


용궁 장면에서는 명창의 발성이 한층 절제되었다. 병든 용왕을 묘사할 때는 힘을 빼고 눌러낸 성음으로 허약한 분위기를 표현했고, 신하들의 부산스러운 장면에서는 빠른 장단과 발림으로 긴박함을 고조시켰다.


토끼 수궁 들어가는 대목에서 소상팔경을 노래할 때의 서정적 아름다움, 좌우나졸들이 토끼를 에워싸는 대목에서의 긴장감, 그리고 토끼가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에서의 통쾌함까지, 각 대목마다 다른 정서와 분위기를 완벽하게 연출해냈다. 더불어, 관객은 “얼씨구” “잘한다” “좋다” 같은 추임새와 박수로 또다른 연주자 역할을 하며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후반부, 토끼가 간을 뭍에 두고 다닌다고 속이며 위기를 모면하는 대목은 이날 공연의 압권이었다. 교묘한 논리로 자라와 용왕을 속이는 토끼의 기지가 관객에게는 해학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남상일은 이 장면에서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극적 긴장과 해소를 교차시켰다. 객석에서는 웃음과 함께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고, 이는 단지 극의 반전 때문이 아니라 육체적 한계를 넘어 무대를 밀고 나가는 예술가의 의지가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육지로 돌아온 토끼는 안도의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독수리를 만나 또 한 번 생명의 위협에 봉착한다. 이 장면에서 남상일은 날카로운 성음으로 독수리의 위세를 표현했고, 고수의 장단은 공중을 휘젓는 날갯짓처럼 빠르고 강하게 이어졌다. 토끼의 불안과 공포는 짧고 가쁜 호흡으로 묘사되었고, 동시에 위기를 기지로 극복하는 순간에는 성음을 확장해 통쾌하게 풀어냈다. 이 연속적 위기와 탈출의 서사는, 고전 우화가 지닌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시험’이라는 보편적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남상일의 소리는 전통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섰다. 토끼가 좌우나졸에게 포위되는 긴장감, 기지로 위기를 벗어나는 통쾌함, 범과 독수리를 차례로 맞닥뜨리며 삶을 이어가는 과정은 현대 사회의 처세와도 맞닿아 있었다. 그의 소리와 아니리, 발림은 고전의 캐릭터들을 지금 여기로 되살려내며, 전통이 여전히 생명력 있는 언어임을 확인시켰다.


남상일 명창이 아픈 몸을 무릅쓰고 선 무대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예술에 대한 헌신과 관객에 대한 예의를 보여준 감동의 시간이었다. 긴 호흡으로 이어진 판소리 한 바탕은 소리꾼의 경지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이를 함께 견디고 호흡한 관객들의 수준 또한 한층 끌어올린 경험이 되었다.


/진보연 기자


[기사원문보기]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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